[기고] 어느 학도병의 6·25
‘6·25’, 그 이튿날인 월요일, 서울 한 명문 중학교(6년제)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의 지시에 따라 학교를 사수한다며 교련 시간에 사용하던 목총을 들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수요일,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교통 등 도시의 모든 기능은 마비됐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시민들은 몸을 떨고 있었다. 미아리를 넘어 서울 시내로 쳐들어온 인민군 탱크 2대가 서울시청 앞에 그 육중한 모습을 나타냈고 자기 키보다 큰 장총을 든 어린 인민군을 처음 보고 놀랐다. 호기심에 숨어서 살짝 봤지만 바로 공포심에 질려 근처의 이모 집 지하실로 몸을 숨겼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진 틈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보였다. 그들은 대낮 대로 상에서 어느 대학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곧장 총살하는 무법천지의 광경도 보았다. 남으로 향하는 인민군 부대를 피해 끊어진 한강 다리를 멀리 바라보면서 주운 널판지를 이용해 밤새 강을 건너 서울을 탈출했다. 무작정 남쪽으로 걷다 경기도 용인 근방 옛날 숯 굽던 깊은 산속으로 들어섰다. 마침 거기엔 서울에서 내려온 상급 중학생 20여명 등이 몸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대학생 한명이 스스로 지도자로 나서 즉각 ‘타공학도대’란 반공단체를 만들고 피란 학생들을 규합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퇴각하는 인민군 부상병과 패잔병을 유인 기습해 총과 수류탄을 빼앗는 용감성도 발휘했다. 9월 초, 전세는 역전되어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인민군 패잔병 수백명이 중부전선 산악지역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북진하는 국군부대 수색 중대에 배속돼 무기를 받고 정식 학도병으로 종군했다. 드디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해병대를 뒤따라 서울로 향해 28일 감격스러운 수도 서울 탈환에도 일조했다. 육군 1사단이 평양에 입성, 학도병 선무공작대가 뒤따라 갈 무렵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 명의의 성명이 발표됐다. 전세가 호전됐으니 각 부대에 배속된 학도병들은 각자 본교로 돌아가라는 지시였다. 그래서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그도 군복을 벗고 전시학교로 돌아갔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고 단기 사관학교 과정인 육군갑종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했다. 합격자 대부분은 그와 같은 학도병 출신이었다. 합격자 전원은 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해 초급장교 과정을 마치고 6개월 후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1953년, 휴전 수개월을 앞두고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피아간의 피해는 말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고지의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심지어 백병전까지 벌이며 단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는 결사적 투쟁이었다. 여기서 젊은 육군소위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매년 6월이 되면 그와 생존한 그의 동기생들은 국립묘지에 모인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6·25 전쟁의 아픈 상처는 잊지 못한다. 바로 피로 지킨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군장병과 유엔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74년 전 한국 땅에서 일어난 비극적 전쟁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6·25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니라 생생히 기억되고 후세에도 전해야 하는 살아있는 역사다. “상기하자 6·25!”, 이는 구호가 아니라 교훈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학도병 정식 학도병 입성 학도병 인민군 패잔병